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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진 캘빈

장 칼뱅 기념관
6, place Aristide Briand 60400 NOYON
전화 : 0033 3 44 44 03 59
팩스 (시청) : 0033 3 44 93 36 39
전자우편 : assist. musees@noyon.fr 
문화사업부 : 0033 3 44 93 28 38
관광사무소 : 0033 3 44 44 21 88
문화유산 영상사업부 : 0033 3 44 09 76 12

개관 : 매주 화요일과 1월 1일, 11월 11일, 12월 25일 휴관.

10시~12시, 14시~18시까지 개관합니다(1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는 오후 17시까지 개관합니다.)

매월 첫 주 일요일은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문서보관실에서는 느와이용 문화유산과 개신교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칼뱅 기념관은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역사 연구회의 발의로 잘 칼뱅의 생가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1927년부터 1930년까지 건축되었습니다. 이 기념관은 종교 개혁자인 칼뱅을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주제의 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이 기념관과 느와이용 그리고 장 칼뱅의 연혁 – 성경, 휴머니즘, 루터 그리고 칼뱅 – 칼뱅의 저서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프로테스탄트 예식과 영성 – 신앙의 자유와 탄압 그리고 신교도와 정치 권력. 아주 드물게 남아있는 16세기의 인쇄물들과 소묘, 판화, 회화, 조각들, 가구와 모형 몇 점 그리고 칼뱅의 삶과 업적에 관한 영화를 이곳에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1509년 7월 10일 느와이용에서 태어난 장 칼뱅은 어머니 잔 르프랑의 독실한 믿음 덕택에 신앙생활이 몸에 배인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아버지인 제라르 코뱅은 성당 참사회의 공증인이었으며 소년 칼뱅은 사제의 길을 걷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성직자에게 부여되는 각종 혜택을 받음으로써 학업에 필요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그는 1523년에 파리에서 수학했고 1528년부터 1531년까지 처음에는 오를레앙에서 그리고 그 후에는 부르주에서 멜시오르 볼마르와 함께 법학과 인문주의를 연구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루터주의자인 이 위대한 교수와의 만남은 그의 방향 설정과 영적 사색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칼뱅의 종교개혁주의자적인 성향이 형성된 것은 그러므로 바로 이 때인 1528년부터 1533년 사이입니다. 그는 1534년에 현수막 사건이 터진 후 프랑스를 떠나 도피해야 했으며 이후 바젤에서 그리스도교 강요  (1536)를 저술합니다. 그는 그해에 제네바에 들렸다가 가톨릭 성직자들이 떠난 후 스위스의 도시에 종교개혁을 강화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기욤 파렐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이는 일시적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하여 1541년까지 프랑스어권 난민 공동체를 맡았고 그해에 다시 제네바로 가서 1564년까지 만년을 정교 분리에 매진하며 보내게 됩니다.

장 칼뱅 기념관
칼뱅의 임종 (상세보기)

프랑스의 종교 개혁은 독일인 마르틴 루터의 저서가 당시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프랑스에 번역되어 배포되는 것으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1517년 수도사 루터는 그의 95개조 반박문에서 면죄부 판매를 폭로합니다. 그는 성서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전도됨을 읽을 수 있다는 자신의 성서 해석을 통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합니다. 그는 1521년 파문되었지만 상당수의 독일 왕족들이 루터의 종교 개혁에 참여하게 됩니다.

프랑스에서도 종교 개혁에 대한 의지는 이미 가톨릭 교회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는 복음주의라는 이름의 운동으로 신약성서의 가르침으로 되돌아오자는 운동입니다. 모 교구에서는 기욤 브리소네 주교와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기독교의 원 텍스트로, 원본의 표현에 가장 가깝게 돌아가는 운동에 동참합니다. ‘칼뱅의 방’에 라틴어와 프랑스어, 그리스어로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성서들은 기독교의 원전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깨달음을 얻은 성직자 칼뱅과 가까운 사이였던 프랑수아 1세의 누이,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프랑수아 1세도 학계와 분리된 인본주의 교육을 장려하면서 왕립 낭독자 학교의 설립에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왕은 새로운 사고에 대해 관대했지만 현수막 사건 때 이 사고들이 공개적으로 난폭하게 정교 분리를 선동하는 식으로 표현되자 입장을 바꿨습니다. 1534년 10월 17일 밤부터 18일 새벽까지 종교 개혁주의자 전사들이 파리와 프랑스 여러 도시에 혐오스럽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교황청 미사의 악덕에 관하여  라는 제목의 현수막을 붙였습니다.  이후에 가해진 압제는 끔찍했습니다.  다수의 ‘루터주의자’들이 어쩔 수 없이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1533년 말부터 불안에 휩싸인 칼뱅은 이미 몸을 감추었습니다.

올리베탕 성서
프랑수아 1세의 초상

칼뱅이 그리스도교 강요 (1536)에서 기술했던 것처럼 신앙을 통한 정당화는 종교개혁 이론의 근간입니다. 신앙고백과 훈육은 1559년 파리에서 비밀리에 열린 제 1차 개혁 교회 회의에서 체계화되었습니다. 이 두 종교를 이미지로 대비하는 것은 판화를 통한 풍자라는 프로테스탄트 선전의 주요 주제입니다. 성서의 무게두 가지 길 이라는 두 판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교황 숭배’ 종교는 태형에 처해지고 ‘그리스도’ 종교는 찬양하는 식입니다. ‘나쁜 길’은 가톨릭의 질서와 관련된 모든 대리인들을 당연히 막다른 길로 몰아넣기 때문에 ‘바른 길’을 택한 신자만이 천국인 예루살렘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네덜란드의 고딕식 교회들은 이 새로운 종교를 숭상하는 일에 적응하게 됩니다. 프로테스탄트식의 건축양식도 등장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1564년 리용에 건축된 파라디 사원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낭트 칙령이 취소된 1685년부터 종교개혁주의자들이 외딴 곳에서 비밀리에 회동을 갖고 있었으며 옷 속에 숨겨서 이동할 수 있도록 분해를 하여 부분 부분으로 나눠 가질 수 있는 성배와 커다란 설교단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성서의 무게
조립식 설교단

프랑수아 1세(1515-1547)는 현수막 사건의 책임자들에게 가혹한 벌을 내렸으며 앙리 2세의 재임기간 (1547-1559)은 신교도 박해가 끊이지 않았는데 1547년 화형 재판소 창설, 1559년 에쿠앵 칙령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1559년 6월 의회 귀족인 안 뒤 부르는 의회의 수요 회기인 수요회 기간 동안 이교도들에게 내리는 형벌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앙리 2세에게 반대 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두 파로 나뉘게 되는데 한 쪽은 왕족인 기즈 일가의 가톨릭파, 다른 한 쪽은 콜리니 일가와 부르봉 콩데 일가의 프로테스탄트파였습니다. 기즈 일가의 영향을 받았던 프랑수아 2세의 재위기간(1559-1560)이 끝나자, 샤를르 9세(1560-1574)와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왕의 자문관이자 재상인 미셸 드 로피탈을 내세워 화해에 나섭니다. 재상은 오를레앙 삼부회의(1560년 12월)가 열리자 화해에 관해서 설명을 했고 이 기간 동안에 포아시 회담 소집(1561년 9월)이 결정되었지만 훗날 열린 이 회담에서도 이론가들은 소모성 대립만 계속했는데 특히 칼뱅의 제네바 특사인 테오도르 드 베즈와 샤를 드 로렌 추기경 간의 논쟁이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실패였지만 카트린 드 메디치의 옹호 하에 화해 정책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1562년 1월 프로테스탄트 교도에게 유리한 칙령이 공표되자 가톨릭측은 이에 반대했고 나바라의 왕인 앙트완 드 부르봉의 참전에 유리한 구실이 되었습니다. 1562년 1월 샹파뉴의 바시 대학살은 종교전쟁의 서막을 올리고 휴전과 내전을 반복하며 이어지던 전쟁은 1598년 앙리 4세(1589-1610)의 낭트 칙령 공표로 중단 되었습니다.

수요회
포아시 회담(그림)

Mon carnet de voyage

Bateau-croisiè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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